지금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
대다수는 우리가 과학적으로, 그리고 사상적으로 진보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 천년 전의 고대 문명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명은 계속해서 발전해왔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짙어져서 이 시기에 과학사적 측면에서는 산업혁명과 진화론으로, 사상사적으로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사상,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등 수많은 사상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의 진보의 물결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무질서로, 파시즘으로, 군국주의의 물결로 서서히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올더스 헉슬리가 바로 이런 역사의 격변기를 살다 간 사람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그가 목격한 역사의 좌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목 잘려나간 십자가
문명사회를 동경하며 보존지역에서 살아오던 한 야만인이 문명사회에 편입되지만 자신의 상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회의 이면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비극을 맞게 된다. 이런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현대사회의 단면이 이와 닮았다고 느꼈는가? 이러한 모습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 바로 버나드가 공동예배를 하는 장면이다.
그룹장이 다시 T사인을 하고 자리에 앉자 예배가 시작되었다.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소마가 놓여있었다. 마시기 전에 '나는 자멸을 위해 마신다.'라고 외쳤고 그 의식이 끝난 후 제 1 공동 찬송가를 불렀다. (중략)
소마가 담긴 잔이 다시 한 번 돌려졌다. 이번에는 '더 위대한 분을 위해 마신다.'라고 외치며 마시고는 제 2 공동 찬송가를 불렀다. (중략)
소설 속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더 이상 예수의 탄생을 기원으로 하지도 않으며 고결한 자기희생의 상징인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에게 기도하지도 않는다. 이제 그들은 현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가능케 한 포드사의 모델 T형이 최초로 생산된 해를 원년으로 삼고, T자형의 상징 앞에서 '포드님'에게 기도한다.
이는 일종의 현대 사회에 대한 메타포일것이다. 서기가 시작된이래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서양 문명의 정신적 기초였던 기독교는 헤겔의 절대정신을 끝으로 더 이상 현대인의 사상을 대변하지 못한다. 현대인에게 돈이란 행복을 추구하는 하나의 수단이자 방법이 되었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자본주의와 그 생산방식은 십자가의 모가지를 날려버리고 T자형의 상징이 되어 사람들에게 물신으로써 추앙받는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너를 위해 부를 땅에 저장하지 말라. 부를 하늘에 저장하라.'라고 설하면서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과 하늘나라보다는 돈과 물질이 더 가까운 것을 어찌하겠는가? 십자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수 밖에.
원시의 신은 가축의 피와 곡식의 낟알을 재물로 받아 가축의 번성과 풍작으로 축복하며 되돌려준다 했던가? 현대도 과연 그러한가? 자본주의라는 현대의 신과, 그것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 그리고 그들을 자본주의의 생산물롤 축복하는 현대 사회의 구조를 보라. 현대와 원시의 신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쾌락의 파시즘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소마라는 약물을 통해 부작용 없이 술과 마약의 효과에 빠져들 수 있고 부부 관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없기에 완전한 난혼과 자유연애를 즐기며 촉각 영화, 종합 음악 등의 수단을 통해 말초적 감각만을 추구한다. 여기서 의문이 한가지 들것이다. 과연 '멋진 신세계'의 정부가 사람들을 쾌락에 물들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는 단순히 현대인의 습성을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인가?
"왜 사람들에게 「오셀로」를 보여주지 않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의 세계는 「오셀로」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사회적인 불안정 없이는 비극을 만들 수 없고요. 지금 세계는 매우 안정되어 있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있으며 얻을 수 없
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아요. (중략) 만약 일이 잘못되면 소마가 그 일을 대신해주죠. 그렇습니다. 당신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창 밖에 던져버린 소마가요."
"「오셀로」는 훌륭해요. 그따위 촉각영화보다 훨씬 훌륭하다고요!"
"물론이죠. 하지만 그것은 대가입니다. 행복 아니면 소위 고등예술이라 불리는 것 중에서 선택해야 하거
든요. 우리는 고등예술을 버리고, 그 대신에 촉각영화와 후각오르간을 갖게 된 겁니다."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청중들에게 풍부한 쾌감을 가져다주니까요."
그렇다. 쾌락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저속하고 일회적인 종류의 쾌락일지라도 행복감을 주기에 추구하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라. 누구나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사용하며 누구나 TV의 소모성 쇼프로그램들을 즐긴다. 매일 그 곳에서 생산되고 '새의 지저귐'과 '좋아요'만으로 수천 수만에게 퍼뜨려지는 정보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자극적인 사진 몇장과 조각난 몇 자의 글 밖에는 들어있지 않다. 이 텍스트들에게서는 텍스트 본연의 목적은 사라지고 소비 욕구의 전파만이 살아남아 몇 자의 광고만을 남긴채 끝이난다. 여기에는 과거의 텍스트가 지니던 파괴력을 한 톨도 남아있지 않다.
그저 바이럴 마케팅 문자 본연의 의미처럼 파급력만이 남아있는 손가락 끝의 소비욕의 배설일 뿐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라고 했던가. 그는 과거와 미래가 검열당하고 조작당하여 정보가 쓸모없어지는, 그리하여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하기에 알려고 하지 않는 미래가 될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헉슬리는 넘쳐흐르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아무도 진실을 찾으려하지 않고,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미래가 될 것을 우려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20세기를 휩쓸었던 사회주의가 보여준 파시즘과는 다르다. 이것은 21세기의, 말초적 배설욕과 쾌락만이 남은, 현대 자본주의의 파시즘에 다름아니다.
멋진 신세계
야만인들의 세상,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아직 대접받는 세상에서 '구출'되어 '오! 멋진 신세계!'라고 소리쳤던 야만인 존은 문명의 부적응자였다. 그의 자살은 단순히 개인의 좌절이 아닌,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문명의 발전으로 이끌어왔던 불행과 비극과 불만족의, 과거 전체의 자살이다.
책이 끝나갈 무렵 문득 이런 말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저자는 사회에 불만족하는 독자들을 위해 단 두가지의 선택지만을 남겨놓는다. 버나드나 헬름홀츠처럼의문이 들지라도 그저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거거나. 야만인처럼 세상에서 도망쳐버리는 것. 살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죽으라니. 이러한 두 해결책은 너무나 극단적인 흑백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사회 그 자체에 대해 본질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고 그저 방관할 뿐이다.
이런 경향은 그의 디스토피아적 소설 대부분에 걸쳐서 드러나는데, 이는 그가 진보하다 못해 퇴보하는 사회의 모습, 즉 우리가 겪어보
지 못했던 세계 대공황과 제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좌절을 겪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런 소설의 완결성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테제는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과연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멋진 신세계인가?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유고시집 소개 (0) | 2016.01.22 |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0) | 2015.12.29 |